마스킹 테이프의 매력에 감겨버렸다: 롤드 페인트

액션 어드벤처 문구류의 세계



책상 위에서 벌어지는 디테일의 세계가 있습니다. 산 넘고 바다 건너 또 다른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과 달리 손바닥 두 쪽만 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액션 어드벤처 문구류의 세계 말이죠.


합정동의 롤드페인트 채민지 사장님(이하 챔지)은 하찮아서 귀여운 마스킹 테이프를 ‘돌돌 말린 물감’으로 재해석해, 딱딱한 플라스틱이나 차가운 스테인리스에 귀여움을 휘감아 생명력을 불어넣습니다. 매장을 꾸려 손님들에게 직접 판매하기도 하고요.


챔지님은 단지 마스킹 테이프를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2019년 대구에서 시작해 2023년 서울 마포구 합정동까지 올라오셨습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237km. 이토록 먼 거리를 움직이게 만든 그녀의 원동력은 무엇일까요?




돌돌 말린 물감, 롤드페인트


롤드페인트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롤드페인트는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마스킹 테이프 가게입니다. 그리고 마스킹 테이프를 활용해 그림을 만드는 작업실이기도 하지요. 유튜브나 인스타그램 라이브를 통해 마스킹 테이프의 다양한 활용법을 알려주는 콘텐츠도 만들고 있습니다.


마스킹 테이프를 처음 접하시게 된 계기는 언제쯤이었나요?

몸이 좋지 않았던 시기에 우연히 접하게 되었어요. 아토피가 너무 심했었는데, 아시다시피 아토피는 굉장한 가려움이 동반되다 보니 긁지 못하도록 집중할 거리를 찾아야만 했어요. 창작하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어딘가에 집중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도 있었어요. 그때 처음 시도했던 게 캘리그라피었는데 깊게 몰두 하긴 했었지만, 몸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조금 더 솔직함이 요구되는 ‘글’이라는 매체를 적는다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집중했던 펜을 놓고 상실감에 빠져있을 무렵,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마스킹 테이프를 발견했어요. ‘글이 아니라 그림이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마스킹 테이프를 찢어 붙여보았는데, 채색되면서 면과 선이 생기는 경험이 귀하게 다가왔어요. 그렇게 마스킹 테이프와 인연을 맺은 지 올해로 10년째입니다.




무언가를 표현하는 도구로 마스킹 테이프를 선택하신 점이 인상적입니다. 예전에도 무언가에 몰두하고 표현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나요?

어떤 부분에서는 대담한 성격처럼 보일 수 있지만, 어떤 부분에서 겁도 많고 조심스러운 편이에요. 무언가를 표현할 때 망가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요.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미술 시간을 좋아하지 않았어요. 빈 캔버스에 붓이나 연필 같은 도구로 획을 긋는 일이 무척 어려웠고 자유롭지 않다고 여겼어요.


하지만 마스킹 테이프가 가진 물성은 저와 궁합이 잘 맞았어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떼어내서 수정할 수도 있고, 말려있는 테이프를 원하는 길이대로 쭉 풀어 손으로 찢어서 붙이는 촉감도 재미있어요. 붙이는 곳에 따라 채도와 명도가 다르고 찢어지는 결에 따라 우연히 나타나는 선도 새로워요. 막 찢어도 산 능선 같은 형태가 나오잖아요.


돌이켜보면 어릴 때부터 하나에 꽂혀 파고드는 스타일이었어요. 좋아하는 걸 오래 끌고 가는 타입이죠. 저는 무언가를 시작할 때 할머니 될 때까지 한다는 마음을 안고 시작해요. 그렇지 않으면 아예 관심이 가지 않더라고요. 학창 시절 춤을 췄을 때는 몸으로 무언가를 표현한다고 생각했어요. 이후로는 문자로 표현하게 되었었고요. 지금 생각해 보면 마스킹 테이프가 저의 또 다른 표현의 도구이죠. 그러고 보니 ‘나는 무엇을 그토록 표현하고 싶은가.’가 저의 평생 숙제일 것 같아요.



롤드페인트에서 만나보실 수 있는 '롤생네컷'



춤을 추셨다고요!?

학창 시절 내도록 췄어요. 크루에 소속되어 이른 바 ‘비걸(B- Girl)’로 활동했었어요. 오락실, 다리 위, 광장 그리고 대구 교대역 역사에 마련되어 있던 자리에서도 춤을 췄어요. 카세트 데크 가지고 춤을 췄죠. 생각해 보면 춤을 추기 위해 여러 음악들을 폭넓게 접하고, 몸을 움직여 춤 동작을 완성시키는 감각이 저에게 큰 자산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한 동작을 완성하려면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점도, 지금의 저를 만들어 준 큰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대구에서 서울까지 237km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오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대구에서 혼자 운영했을 때는 공간적으로 운영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었어요. 온라인과 제작 파트를 담당하는 ‘다라이 님’과 함께 업무를 시작하며 근처에 창고 겸 사무실을 구해 공간을 나눠서 사용하긴 했지만 익숙해진 편이었죠. 하지만 작년에 첫 직원이 입사하게 되면서 다소 좁은 카운터의 동선에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고 내부적으로 해소되지 않는 공간적인 문제들이 하나 둘 늘어가며 ‘옮겨야 하지 않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주변에 적합한 공간들을 찾아보다가 대구에서 대구로 옮기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에 대한 의문도 있었고, 그 당시 서울, 경기권에서 찾아오는 손님도 적지 않았다는 점이 기억나더라고요. 저희 매장의 경우에는 마스킹 테이프를 직접 찢고 붙여볼 수 있는 경험이 중요해서 이벤트가 많은 서울로 온다면 많은 분들에게 경험을 드릴 수 있지 않을까 판단했습니다.




대구에서 일하던 직원이 서울까지 직원과 함께 왔어요. 롤드페인트가 갖고 있는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직원인 ‘새벽님’과 함께 서울로 올라오는 일은 우리에게도 큰 결심이었어요. 대구에서의 영업이 매우 안정적일 때였거든요. 직원이 저희와 함께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무렵, 조심스럽게 의견을 물었는데 처음에는 당황하다가도 서울로 이사하는 것이 롤드페인트에게 많은 기회가 될 것 같다며 공감해 주더라고요. 이후 몇 차례 스스로 이사에 대한 질문을 던져오기도 했고요. 그렇게 서로 조금씩 다가가며 공감대를 형성했어요. 지나고 나서 보니 ‘새벽님이 함께 안 가면 어떡하지’라는 걱정을 한 반면, 새벽님은 ‘나를 안 데리고 가면 어떡하지’라는 고민을 품고 있었더라고요. 손발이 잘 맞는 직원과 함께 올 수 있어서 더욱 빠르게 안정될 수 있었어요.


저는 워낙 손님들에게 다가가는 일에 거부감이 없고, 마스킹 테이프를 소개하는 일이 재미있어요. 하지만 사람마다 텐션이 다르기 때문에 제품과 공간을 소개하는 일이 쉽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새벽님께서 매장 가이드 맵을 만들거나 매장에 비치된 마스킹 테이프 활용 가이드북을 만드는 등 예상치 못한 일들을 해주더라고요. 손님들께 다가가 롤드페인트를 적극적으로 소개하는 일이 그동안 챔지의 서비스였다면, 새벽님의 모습을 보면서 이 또한 롤드페인트의 서비스가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만큼 적극적으로 롤드페인트를 생각해 주는 친구가 있어서 서울로 올 수 있다는 확신을 느낀 것 같기도 합니다.



마스킹 테이프를 활용한 다양한 작업들 @rolled_paint


디테일의 세계가 있는 마스킹 테이프


롤드페인트의 입고 기준이 있으신가요? 마스킹 테이프에도 유행하는 패턴이 있다든지, 업체가 있다든지요

롤드페인트 오픈 전부터 작업 시에 가장 기본으로 즐겨 사용하던 ‘mt’의 단색 마스킹 테이프는 항상 전 색상을 보유하고 있으려 해요. 물감처럼 활용할 수 있는 텍스처 패턴들은 ‘내추럴 시리즈’라고 해서 자체 제작하고 있고요. 물론 입고 기준에 저희의 취향이 반영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오프라인 상점은 남녀노소 다양한 연령층의 손님들이 찾아 주시다 보니 되도록 여러 테마의 마스킹 테이프들을 입고시키려 노력하고 있어요. 유행이라는 단어는 항상 조심스러워요. 제작을 할 때는 더더욱이요. 기존에 제작했던 모든 마스킹 테이프는 10년이든, 20년이든 긴 시간 유지하며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에요. 매장을 방문했던 아이 손님들이 언젠가는 커서 다시 저희의 공간과 제품들을 찾아준다면 너무 행복할 것 같아요. 그날의 경험을 새록새록 떠올려 보면서 말이에요. 반짝이는 유행스러움보다는 오랜 시간 함께할 수 있는 제품들에 더 힘을 쏟고 싶다는 바람이에요.




마스킹 테이프도 제품이다 보니 신제품 주기가 중요할 것 같아요. 고정적인 신제품 출시 주기가 있으신가요?

고정적인 신제품은 시즌 한정으로 제작하는 상품을 제외하면 별도로 주기를 정해두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현재 준비 중인 신제품이 있고, 협업 중인 디자인도 있어서 꾸준히 작업들을 이어가고 있어요. 


대신 저희는 공간에서 자체 제작 상품만을 판매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보니, 신제품 소식은 다른 브랜드나 입점되어 있는 작가님들의 마스킹 테이프로 소개해 드리는 경우도 있답니다.


무인양품 강남점에 놀러 갔다가 롤드페인트를 보고 반가웠어요. 무인양품에 입점하시게 된 과정이 궁금했습니다.

서울 이전과 동시에 바로 입점 준비를 해야 했기에 꽤나 분주한 시간을 보내게 되었었어요. 감사한 제안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고 싶어 무인양품에서만 구매하실 수 있는 6종의 세트 상품들도 출시하게 되었죠. 작년에 베이직 패턴 라인을 기획하며 제품 촬영 시에 활용했던 소품들이 대부분 무인양품의 제품들이었는데 이번 입점 제안이 무척 반갑고 기뻤어요.


그 당시 기획했던 베이직 패턴은 하나의 ‘점’과 ‘선'만을 이용해 각기 다른 9종의 패턴이었어요. 당시 이 패턴들을 활용해 볼 면적이 필요했는데 무인양품의 제품들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죠. 특징이 없는 제품들에 특별함을 부여하는 것이 무인양품의 철학과는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베이직 패턴을 구상할 당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 어떠한 공간에서든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어우러지는 조화였습니다. 마스킹 테이프를 붙여 장식했지만 그것이 여러 사물들과 섞여 있을 때 마스킹 테이프가 붙여져 있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 패턴 디자인의 목표였거든요. 색이 없는 무인양품의 제품에 저희의 패턴을 더해 한데 어우러지게 하는 작업은 무척 흥미로웠어요. 현재도 무인양품의 제품들에 계속해서 마스킹 테이프로 옷을 입히듯 장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가고 있어요.




마스킹 테이프에 담긴 마음


사방에 둘러싸인 마스킹 테이프 진열장이 인상적이에요. 특별한 의미가 있나요?

정사각형의 격자 진열장은 저희의 오랜 꿈과 연관되어 있어요. 이 공간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도 건물 외벽의 사각 타일이 우리의 격자 진열장과 비슷하다는 점이 운명처럼 다가왔다는 점도 한몫해요.


롤드페인트 오픈 시작부터 공간에 대해서는 다라이님의 역할이 매우 컸어요. 조경 디자이너였던 다라이님이 매장 전체의 인테리어를 늘 담당해 주셨었거든요. 대구에서 1층에 자리하고 있을 때 마스킹 테이프를 전시하는 구조나 진열장 디자인, 체험 테이블 디자인까지 자체적으로 디자인한 형태입니다.



'마스킹 테이프가 빼곡한 공간'을 향한 염원을 담아 만든 3D 렌더링

롤드 페인트의 한쪽 벽면은 마스킹 테이프로 가득하다.


마스킹 테이프가 온 공간을 빼곡 채운 공간을 오래전부터 꿈꿔왔어요. 하지만 마스킹 테이프가 낯선 손님들에게 사방을 가득 채운 마스킹 테이프가 어렵게 느껴질까 봐 걱정이 들더라고요. 결국 저희 바람보다 작은 정사각형의 격자 진열장에 단색 마스킹 테이프를 차곡차곡 쌓아 두는 것부터 시작하게 되었었어요. 이후 저희 상점에 다양한 연령층과 남성 고객층의 방문 비율이 자연스레 늘게 되었는데, 그쯤 해서 샘플 사용을 좀 더 쉽고 가볍게 접근해 보실 수 있도록 진열장에 디스펜서를 설치해 목표로 바랐던 디스플레이 방식을 작년 리뉴얼을 통해 시도해 보게 되었었답니다. 


저희에게는 진열장이 마치 커다란 우든 팔레트와 같아요. 손님들이 매장에 방문하셔서 손에 들게 되시는 책갈피 종이는 작은 캔버스, 마스킹 테이프 샘플을 툭툭 찢어 붙여 보시면 어느새 손님들도 저마다의 그림을 그리며 붓질을 하고 계시는 것과 같죠. 책갈피를 통해 마스킹 테이프라는 도구와 친해지시기를 바라요. 언젠가는 저희뿐만 아닌 손님들에게도 저희의 진열장이 커다란 우든 팔레트, 또 마스킹 테이프는 물감처럼 보인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아요.





영업시간 12시 오픈, 마감 8시. 쉽지 않은 스케줄인데 어떤 마음으로 문을 열고 닫으시나요?

기본적으로 매장에 찾아오시는 손님들에 대한 기대감이 가장 커요. 저는 오프라인의 팔딱 팔딱 뛰는 현장감이 너무 좋습니다. 서로의 표정과 말, 저희 제품들에 대한 피드백은 물론 섬세한 관심을 주고받는 환경이 오프라인의 매력이죠.. 물론 운영하다 보면 힘들 때도 있지만 손님을 맞이하고 무언가를 나누는 일이 저에겐 신부터 나는 일이에요.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마스킹 테이프는 쓸모가 적은 물건일 수는 있죠. 결국 롤드페인트는 손님들이 마스킹 테이프라는 도구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거점이 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롤드페인트를 아끼시는 분들에게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주세요.

마스킹 테이프는 단 한 줄만 붙여보더라도 소소한 변화가 일어나요. 그리고 테이프를 붙임으로써 일종의 표시를 할 수 있죠. 예컨대 회의 시간 때 여럿이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왔다면, 마스킹 테이프로 구분 지어 개인화할 수 있어요. 온전한 제 것이 되는 거죠. ’Roll your own space.’라는 슬로건처럼 마치 롤러로 롤링하듯 마스킹 테이프로 주변 곳곳을 꾸며 보시길 바라요. 특별하지 않던 것도 특별해지는 사소한 즐거움을 느끼실 수 있으실 거예요. 손님들도 롤드페인트를 통해서 소소한 가치를 발견할 수 있길 바라고, 나아가 본인들의 삶에 꼭 맞는 도구를 찾았으면 좋겠어요. 꼭 마스킹 테이프처럼 만져지는 도구가 아니라도 괜찮아요. 도구라는 게 꼭 물질이어야 할 필요는 없어요. 그저 자신이 몰입할 수 있고 무언가를 표현해낼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자신만의 도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앞으로도 마스킹 테이프를 통해 행복하게 변화되는 마법 같은 일상을 꿈꾸며 오래도록 곳곳에 롤링하는 날을 보내겠습니다.





Editor : 태진 &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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